너의 무보(舞譜)
Your Choreographic Notation
계획대로라면,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모종의 소위 그림에 대한 배신이 몇 차례 눈에 띌 터이고[1] 그리고 그 혐의는 전시장 내부로 진입했을 때 확실해진다. 공들여 정교히 제작한 받침대 위에 그림을 안착한다. 하지만 이 자리 잡음은 일종의 가설무대에 올라선 배우의 몸 위치와 흡사하다. 너는 무보법(舞譜法)에 따라―혹은 그 무보법에 닻 내리지 못한 전후의 미세한 움직임에 따라―이동한다. 너. 네가 없다면 ‘무수히 흩어지는 순간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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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진표를 알았지만, 몰랐다. 이편이 정확한 속내다. 벽면에 수직으로 걸리는 회화 일반을 응당 상정하고 그를 만났는데 전제가 무너졌다. 하물며 그는 회화를 벽이라는 지지체에 흔히 쉽게 걸지 않는다. 그는 앞뒤 나무 패널을 샌드위치 식으로 조립한 캔버스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캔버스는 자신이 고안해 낸 방법에 따라 벽으로부터 일정 공간을 띄운 채 부착된다. 이유를 묻자 그는 ‘그림의 역할’에 대한 생각으로 답을 우회했다. 말하자면 “그림이 자기 스스로 내어 보이게 할 수 있게끔”[2] “그림이 한눈에 들어오는 방식”을 찾았다. 이때 ‘한눈’에 들어온다 함은 시지각적 관찰 순간을 포함하면서 나아가 그림의 순도(純度)에 대한 자기 계측의 결과에 가깝게 느껴진다. 흔히 가장 그림답다 일컬어지는 것들로부터 이행해 온 기보(記譜)는 이번 전시에서 너를 위한 무보로 전환된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일종의 가설무대는, 전진표 그림의 역할이 운신할 오늘의 공간에 대한 해석이다.
그는 초기작에서부터 지금 이 해석까지 이행의 포석을 두었다. 초기작에서의 가림막은 재현 대상에서 점차 은유로 변화했다. 가림막은 고대 그리스 제욱시스(Zeuxis)와 파라시오스(Parrhasius)의 대결에서부터 렘브란트(Rembrandt)의 〈성가족(The Holy Family)〉에 이르기까지 기교의 승부를 가리는 눈속임 장막이자, 장막을 드리웠다는 그 자체로 이면을 들여보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는 장치다. “가림막으로 가리려고 노력하는 것들”은 곧 그에게 고정관념―특히 회화의 고정관념―으로 수렴되어 새로운 과제로 도출됐다. 전진표가 제안하는 보기의 방식 바꾸기는 공사장의 가림막이, 회화의 지지체인 천이 임의로 베어놓은 분절된 시공간을 잇기 위한 묘안이다. 그래서 “당신이 그리는 이것이 회화(painting) 입니까”, 물을 때 그는 “네”라고 답을 하나, 이때 회화 일반은 너무 넓어서 무방비하거나 너무 닳아서 무용해지고 만다. 대신 “산발하는 사건” 혹은 “파편”[3] 정도로 물러서며 방어하는 지대에서 다시 준비한, 그림 일반 대신 나의 그림 보는 방식과, 나를 통해 너의 그림 보는 방식이 발생한다.
그에게는 구체적 확신에 이르렀지만, 관객에게는 청유로 다가올 회화의 자리 잡음은 확실히 움직임에 영향을 미친다. 그로부터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의 「예술과 사물성(Art and Objecthood)」(1967)을 떠올린 건 내 자의적 경유다. 프리드의 글은 첫 독해에서부터 철저히 오독을 야기시키고, 그래서 오독으로부터 오히려 예술이 대상화되는 분기점을 또렷하게 각인시킨다. 짧게 언급한다면, 프리드는 당대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출현을 리터럴 아트(literalist art)로 명명하면서 “리터럴 아트의 감각은 관람자가 리터럴리즘 작품을 대하는 실제의 상황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연극적”이라고 설명한다.[4] 멸칭에 가깝게 붙인 연극적이라는 수사는, 뒤집어보면 이제 관객의 개입이 분연해졌음에 대한 공표와 다를 바 없다. 어떤 회화도 그 주위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전진표가 방어하는 지대에서 재정비한 그림은 이제 너를 초대한다. 그는 몇 차례 전시장에서 큰 원을 그리며 관람할 너에게 동선 상에서 그림을 마주할 때, 그리고 스칠 때, “힘들어 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예컨대 눈에 밟힌다는 의미의 연장이지 않을까? 바람은 있다. 그럼에도 너를 통제할 순 없다. “어떤 빛의 흐름으로 사람들이 보게 될 것 같은 상상을 하면서 그린” 그림 주위에 공간전치사(spatial prepositions)들로부터 유래한 어휘가 겹겹이 포개어지는 듯하다. 마치 측면에서 치고 드는 분절된 언어는 의미로 공글러지지 않아서 오히려 날카롭다. 그는 “이것은 세계를 말하는 새로운 단어, 새로운 문장과 문단 구성의 재료로서의 음가(音價)에 가깝다”[5]라고 작업 세계 전반에 대해 서술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이 음가는 형태를 빌어 드러난다. 그림의 여러 군데에 스텐실로 정교하게 처리된 어휘들이 ‘무방비하게’, ‘옹알이’처럼 조용하기를 바라지만 환기 작용의 힘은 쎄다. 확인한 몇몇 단어들은 ACROSS, BEFORE, NOWHERE 등이다. 그런데 그래서, 어디로, 어떻게 운신해야 할까? 여닫음은 전적으로 너의 감각과 보는 방식에 달려있다. 명료하지 않아서 재량은 내게로 온다. 전시 퍼포먼스를 위한 대본도 ‘어긋난 말’, ‘접힌 문장’, ‘불투명한 말의 틈’을 마지막으로 페이드 아웃되고 있다. 『수행성의 미학』의 저자 에리카 피셔-리히테는 ‘세계의 재마법화’[6]로 이 순간을 정리한다.
미학적 경험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향한 경계선 넘기이며, 이것 혹은 저것 속에서의 변환”[7]이 발생하는 특별한 상황을 경험하는 이는 (나와) 너이고, 이를 연출하는 이는 작가다. 대체로 전치사와 같이 독립이 어려운, 가벼운 지시어들이 우리의 대화였지만 그로부터 고유명사도 몇 개 얻었다.[8] 문체에 대한 취향을 질문하다가 얻은 명사들을 그에게, 작품에 다가가기 위한 단서로 여겼다. 그러나 몇 권의 책을 짚어 더듬어 볼 때 평소와는 다르게 이격(離隔)이 생겼다. 예컨대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으로부터 ‘너’가 불쑥 솟아올랐다. “너는 한량이고, 몽유병환자고, 멍텅구리다.”[9] 이 글의 너는 사실 페렉으로부터 착안했다. 한편 전진표는 작품명 〈오스티나토(ostinato)〉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의 ‘리토르넬로(ritornello)’를 경유했다. 들뢰즈가 차이를 동반하면서 반복되는 표현의 특질로 리토르넬로를 고안했다면, 전진표는 보다 검박한 방식으로 반복을 구현한다. 크게 세 단계 톤으로 이루어진 아크릴의 반복된 변주인 〈오스티나토〉는 전작에서는 파란색의 톤으로, 이번 전시에서는 회색 톤으로 인접한다. 〈오스티나토〉의 제작 공정은 엄숙할 정도로 정밀하다. 그러나 오차 없는 정밀함을 즐기되, 그 결과에 연연해 않는 성정을 이 연작에서도 보여준다. 무한 동일 반복으로 보일 정도로, 미세한 변화에서 단서는 초대받은 이의 감각에 달려있다.
전시장 내부로 진입한 작품과 〈오스티나토〉가 이 전시에서의 몫이 비교적 선명하다면, 내게 동선 상 변방에 자리할 회화의 경우 메타 회화처럼 다가왔다. 전진표의 설명에 따르면 “한 장면을 구성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떤 조각들을 그림으로 실천한 경우”로서, 이 조각조각이 캔버스에 배열, 반영된 작품들은 몸의 움직임에 동반되는 시지각 경험보다 회화 안에서의 구조화가 더 큰 과제로 보인다. 여러 차례 덧그리고 또 그러다가 긁어내고 또 뜯기도 하고 하는 절차는 작업을 위한 디렉터리(directory)로 보일 정도로 회화 내적 공간감과 회화 외적 작업 구조 상의 입체감을 엿볼 수 있게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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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발생한 이격에 대한 예를 하나 덧붙여 본다. 들뢰즈의 리토르넬로 장[10]에서 나를 매혹시킨 이는 파울 클레다. 클레는 회화와 관련하여 회색의 점에 대해 말한다. “이 회색의 점은 무엇보다도 차원이 없는, 위치 결정이 불가능한 카오스, 카오스의 힘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방황하는 선들이 뒤엉킨 하나의 덩어리 외에 다름아니다.”[11] 조형의 구성 요소로서의 회색의 점 아닌, 회화가 지니는 역능을 불러일으키는 회색의 점은 회화 가능성의 최소와 최대 지대 스펙트럼에 대한 하나의 은유처럼 들린다. 전진표는 (클레의) 회색점의 은유로부터 점선면으로 확장하되, 그 땅의 끝이 캔버스의 외곽이 아님을, 사건의 순간들로 미분한다. 발이 달린 그림이란 이런 것일까? 받침대를 통해 딛고 넘어서려는 회화에 대한 의욕은 무모한 것일까? 그러나 사물성의 분기를 넘은 동시대 회화는 회화를 결코 이상으로 수렴시키지 않으면서 과제를 설정한다. 전진표의 무보는 ‘너무 넓어서 무방비하거나 너무 닳아서 무용’하지 않기 위해 너를 소환한다. 「너의 무보」는 곧 우리의 것이다.
각주
1. JJ 중정 갤러리 입구 옆 공간에 작품에 대한 일반 감각으로는 뒷면으로 보일 법하게 배치된 〈Untitled〉 연작은 낮은 조도 아래 상당히 독립적인 군(群)을 이루고 있는 듯 보인다. 전시 상 프롤로그이지만, 에필로그 역할도 도맡아서 향후 전시를 예비한다. 실제로 이 구조물은 이후 작품으로 변주 예정이다.
2. 이하 큰 따옴표로 처리한 문장들은 전진표와의 2025년 5월 2일 대화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3. 파편이라고 부를 근거는 내가 본 글에서 메타 회화로 칭하는 〈Fragments on A Grid I〉과 〈Fragments on A Grid II〉이다.
4. 마이클 프리드, 「미술과 사물성」, 이영준 옮김, 이영철 엮음, 『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 시각과 언어, 1997, p. 166.
5. 전진표로부터 건네받은 포트폴리오의 작가노트에서 인용한다.
6. 완결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공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한마디로 세계의 재마법화이며, 공연에 참여한 사람들의 변신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에리카 피셔-리히테, 『수행성의 미학』, 김정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 p. 401.
7. Ibid., p. 441
8. 미나토 지히로(港千尋), 조르주 페렉, 알랭 드 보통, 지그문트 바우만. 그 외 〈오스티나토〉를 위해 질 들뢰즈를 언급했다. 더 있을지 모르지만 기억과 메모에 남은 이름들은 이와 같다.
9. 조르주 페렉, 『잠자는 남자』, 조재룡 옮김, 문학동네, 2013, p. 23.
10. 『천 개의 고원』의 11장 「1837년-리토르넬로에 대해」이다.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3.
11. Ibid., pp. 59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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